(긴 글 주의!!)


어린 시절... 난,,

상처에 또 상처.. 아물기도 전 또 약을 바르고 또 치유라고 말하곤 감추고.

그런 것들의 연속이었다.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최근 인천의 한 어린이집에서 있었던 보육교사의 4살 유아를 폭행한 사건!! 으로 나라의 거의 모든 부모들이 불안감에 휩싸였다. 출근하면 만나는 사람들 대부분이 아이를 두고 있는 아빠들이기에 더 관심이 커서 그런지. 줄곧 이 이야기들이 주된 휴식시간의 대화내용이었다. 이번만큼 충격이 컸던 건 근래에 정말 없었던듯 했다. 이건 아이가 있건 없건 감정을 추스를 수 없을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영상을 보기 전.. 그저 주먹으로 머리를 가볍게 때렸거니 했다. 영상을 보고 나도 모르게 '악' 소리가 나왔고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고 분노가 아닌 아이에 대한 미안함에 며칠 째 밤잠을 설쳤다. 이는 와이프도 마찬가지. 여느때 같았음 서로 밤마다 잠들기전까지 수다 삼매경에 빠지곤 했을 법한데 우리 부부는 말이 없었다. 그저 서로를 안아주기만 할 뿐.


영상 속 아이는 4살 여아. 내 딸도 4살. 머리 묶은 모양하며 체구도 비슷. 집에서는 왈가닥 개구쟁이 딸이지만. 어린이집이나 사람들 많은 곳에선 주뼛주뼛. 수줍음 많은 아이가 돼 버리는. 선생님 앞에서는 더더욱 그러했다. 너무도 비슷해서 와이프도 나도 충격이 더 컸던 것 같다. 리유의 선생님은 잘 해 주시지만, 그래도 혹시 하는 마음이 앞서 불안감이 많이 생겼다. 처음부터 잘 해주었던 것도 아니었기에. 어린이집 등원 초기에는 차별아닌 차별을 받아야 했고.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어린이집에서도 자주 혼나는 것 같았고. 자꾸만 가기 싫다는 말을 계속 했었다. 선생님이 싫다는 말도 많이 했었고. 그래서인지 뒤늦게 리유의 어린이집 생활이 궁금해졌다. 집에서와는 다른 아이의 모습이 그려진다더라. 대부분의 아이들이.


리유는 등원 시기를 맞출때도 리유가 어느정도의 표현력이 생기면 보내자고 했었는데. 아마도 보낼 당시부터 리유는 또래 아이들 보다 몸짓을 비롯한 표현력이 좋았던 것 같다. 그래서 끊임없이 묻고 또 묻곤 했었지만 아이들이 어찌 그걸 다 표현하고 알겠는가. 그저 선생님과 그곳에 계신 어른들을 믿어야지. 생활방식도 많이 달라져서 무슨 일이 하루종일 있는건지 궁금해 초기엔 여기저기 인터넷으로 알아보고 서울형 어린이집 이란 것도 알아냈고. 서울형이 되려면 CCTV도 의무적으로 설치가 돼 있어야 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연동된 그곳으로 알아보니 설치가 돼 있다던데. 실제론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니 더 불안했었다. 지금에야 선생님들도 리유를 이뻐라 하고 하셨으니 이렇게 말할 수 있지. 당시엔 얼마나 불안하고. 미안하고. 왜 그곳 어른들이 좋은 분들이고 너를 사랑하는 분들이라는 사실을 설명해야 했는지.


아무튼 이번 사건으로 적잖이 충격을 받으신 분들이 많은 모양이다. 한 동안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리유와 행복했던 기억들을 포스팅 하자니 눈물이 날 것 같았는데. 이제야 좀 진정이 된다. 정부와 여당이 대책이라면서 내 놓은 생각을 보니 참. 역시 그들 답다. 라는 생각 밖에 안 들었다. 어린이집에서 학대한 사실이 확인이 되면 폐쇄한다라. 이 양반들은 뭐가 원인이고 왜 그렇게 되었는지 정말 모르는건지. 아님 모르는 척 하고 자기들 밥그릇만 중요한지. 그들에겐 정녕 앞으로의 남은 총선, 전당대회 밖에 머릿속에 없는가보다. 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서두에 말한 나의 이야기를 해 보자면,

지금의 아이들을 두고 있는 부모들은 공감하겠지만.


나는 8살. 초등학교 1학년. 어리다면 여전히 굉장히 어린 나이다. 그 시기에 나는 어른들의 민낯을 또렷이 봤고. 세상의 가장 어두움을 몸으로 느낀 시기다. 초등학교 1학년. 학교 생활의 시작을 알리는 그 시기에 나는. 처음으로 '선생님' 이란 존재를 알게 되었다. 8살에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넘어섰었다. 그때 의지할 사람이라고는 가족 외에 선생님 밖에 없었다. 그런 그때. 담임 선생님은 아버지가 없다는 이유로 차별. 가난하다는 이유로 또 차별. 촌지를 보란듯이 받았고. 촌지를 못 내면 시계 풀고. 반지 빼고. 그대로 아이가 저 뒤까지 날아갈 정도로 심하게 때렸었고. 나의 첫 선생님은 그러했다.


내가 운이 없었는지. 초등학교 다니는 내내. 한 두 선생님을 빼고는 심하게 차별 당하고. 많이 맞기만 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나는 학교에 가기 싫었다. 맞기 싫어서. 선생님들은 부모들을 통해서도 왕따 아닌 왕따로 낙인 찍고 있었다. 그래서 정말 외로웠다. 늘 혼자였고. 늘 맞기만 했었고. 그래서 모든 학업에 관심조차 없었다. 어머니가 가라고 하니깐 갔었다.


중학교때도 마찬가지. 더 심하면 더 심했었다. 남중이라 더 그럴지도 모르겠는데. 선생님들의 폭력 수준이 폭행 수준이었다. 너무도 무서운 나날들이었다. 당연히 공부는 안했다. 수업시간에 들은 게 전부다. 그 시간만큼은 잘 들었다. 이것 또한 어머니에 대한 존경심은 늘 강했었기에 공부는 잘 하지는 못해도 중간만이라도 해라. 라는 말에. 수업시간에만 열심히 했고. 중간정도는 했다.


고등학교 올라와서도 여전히 선생님들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었다. 형편상 공고로 진학 할 수 밖에 없었는데. 당시엔 공고가 학비도 쌌고 내가 마련할 시간이 충분히 주어졌기에. 아무튼 고등학교 시절이 가장 즐거웠고. 가장 행복했었다. 왜? 유일하게 선생님께 정당하지 않은 이유로 맞은 적이 없었다. 내 얘기에 귀 기울여주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할 수 있게 잘 도와주셨다. 덕분에 축구를 좋아했던 내가 축구 마니아로써 누릴 수 있는 거의 모든 것들을 누리게 되었었다. 아! 덕분에 많은 좋은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지만 어머니께서 아직도 우리집 가보라며 아껴 두시는 '대통령 감사장' ... 여러모로 고교시절의 3년은 많은 일들도 있었지만 열정 가득했고 늘 즐거웠던 그때였다. 공고라서 더 겁을 먹고 편견을 가져서 더 감회가 깊은 것도 있었겠지만. 그런 걸 떠나서 당시의 선생님들은 정말 친구 같았고. 누구보다 내 얘기에. 내가 보고 있는것. 관심사를 가장 많이 공유했던것 같다. 처음으로 어른들과 소통을 했었던. 시기였다. 선생님의 태도. 이거 하나 달라졌을 뿐인데. 친구들도 당시에 선생님들께 많은 생각들을 전했던 것 같았다.


한 예로 보면, 당시에 친구들과 우스갯 소리로 말했었는데.. 축구를 좋아하던 친구들끼리 모여서 또 나누고 더 커지고 하다 그게 붉은악마의 결성이 되었다. 초기 창단 멤버였지. 후후. 지금의 붉은악마 의장 역시 당시에 함께 했었던 분. 아무튼 그때 내가 정말 좋아하고 잘 하고 있다는 얘기도 학교측에서 알고 있었고. 교장 선생님은 우리를 위해. 당시 프랑스 월드컵이 있었었는데. 그 원정을 지원하기 위해 공문까지 마련해 교육청에 제공해 주시기도 했었다는. 물론, 당시엔 나이들이 걸려서 가진 못했지만. 뒤늦게 선생님들이 많은 노력을 하셨다는 얘기에 다들 감동받고 그 자리에서 울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보육교사. 든 교육청의 부름을 받고 교직생활 중이신 선생님이든. 이 모두는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들의 삶을 도와주고자 일을 하는 것이었으리라. 지금에야 일반 선생님들이 공무원이라고 신의 직장인양 부러움을 받고 있지만. 당시엔 다른 분들에 비하면 열악하기 그지 없었던 분들이었다. 아마도 비슷하진 않아도 닮은 구석이 꽤 많을 것이다.


내가 느끼기에도 어린시절 가장 싫었던 건. 학년이 올라가면 늘 했었던. 아버지 뭐하시노. 집은 월세냐, 전세냐. 차는 있나 없나. 등 많은 부분을 까발려야 하는 그런 게 정말 싫었다. 그렇게 줄 세우기 하더만 여전히 아직도 그렇게 하는 학교가 있다더라. 아파트 별로 아이들의 입학식을 치루는 학교 소식은 참 씁쓸하게 만들었다. 내 아이가 그렇게 당한다면 나는 미안해서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만 흘렸으리라.


나는 어린시절 끊임없이 차별받고 끊임없이 그들을 두려워 했었다. 그런데 말이지. 왜 유독 고교시절 선생님들은 그러했는지. 다시금 묻고싶다. 내가 알던 선생님들의 모습이 아니었다. 성적에 관한 노력에 관한 부분에 책임을 묻고 그에 대한 체벌은 있었지만 부당하게 맞은 기억은 없었다. 그저 신뢰할 수 밖에 없었고. 언제고. 어느때고. 주말이나 쉴 때도 선생님을 자주 찾았었다. 선생님은 따뜻하게 맞아주시며 자장면을 시켜주셨고. 가족의 안부마저 서로 공유 했었다. 그래서 학교가 좋았고. 선생님이 좋았다. 그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었다.


지금의 리유가 어린이집 비롯. 앞으로 가게 될 학교라는 곳에서 차별 받지 않고. 부모 외에 가장 자신의 이야기를 잘 알아줄 그런 분들을 많이 만났으면 좋겠다. 아이의 꿈이 방해되지 않게. 아빠가 그들로 부터 마음껏 꿈을 펼쳤기에 하고픈 일을 하며 즐겁게 살지 않느냐며. 내 아이와도 공유하고 싶다. 정당한 체벌이나 혼내는 것은 부모로써 당연히 필요하다고 보고 또 그 부분에 대해서는 모든걸 맡겨 드리겠지만, 아이가 느끼기에 부당하다고 느껴지는 것들은 되도록 없어지길.


아이가 즐거우면 당연히 출산율이 증가한다. 복지가 출산율을 늘리는게 아니라고 이 양반들아. 지금은 아이들을 키우기가 너무 힘든 세상이다. 당신들의 지갑만 두둑히 할 생각에. 돈. 돈. 돈. 이 나라는 정말 돈 밖에 모르는 걸까.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기 힘들다고 외국가서 살고 싶지는 않다. 당신들은 어른 이잖아. 어른답게 아이들을 사랑해 주세요.


힘든거 알지만. 여건이 너무도 열악하다는 거 알지만. 아이들의 눈을 보면 그렇게 생각이 드나요? 물론 내 아이라 할지라도 가끔씩 던지고 싶은 감정이 생기는 것도 알지만. 조금만 더 아이의 심장에 귀 기울여 주세요. 잠시만 안아줘도 아이들은 이내 잠잠해 집니다. 진정 "hart to hart "  가 필요해 보입니다. 화가 날때 꼬옥 안아 주세요. 가슴과 가슴으로 대화하세요. 아직은 아이들은 번지르르한 입술놀림에는 익숙치 않거든요.




# 긴 글 감사!! - 이렇게라도 정리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어요. 인천 어린이집 사건만으로는 아닌. 그 후로 그 전에 있었던 개에게 물려죽은 아이의 이야기. 울산의 어린이집 원장부부 폭행사건으로 죽은 23개월 아이 성민이 이야기까지. 너무도 가슴 아팠어요. 승환이형 노랫말 처럼. "어떻게 사랑이 그래요?" 라며 되묻고 싶어요. 아이들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 갑시다. 아이가 행복하면 우리도 행복합니다. 약자가 존중받는 시대가 당연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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